백화점의 이커머스 반격, 무기는 가격이 아니다
Overview
현대백화점이 지난 4월 6일 선보인 프리미엄 큐레이션몰 "더현대 하이"가 출시 9주 만에 신규 회원 84만 명 증가, 거래액 43% 성장을 기록했다. 할인·프로모션 대신 MD 큐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운 이 전략에 신세계·롯데도 각자의 방식으로 뛰어들며, 국내 백화점 3사가 이커머스를 가격이 아닌 취향으로 다시 설계하고 있다.
쿠팡·무신사가 각각 로켓배송과 큐레이션 커머스로 온라인 유통을 재편하는 동안, 국내 백화점 3사는 줄곧 이 싸움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프라인에서는 여전히 강자지만, 자체 온라인몰은 대체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런데 최근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지난 4월 6일 내놓은 "더현대 하이(Hi)"가 출시 9주 만에 신규 회원 84만 명 증가라는 숫자를 찍었고, 신세계·롯데도 각자의 방식으로 온라인 큐레이션 전략에 뛰어들고 있다. 세 회사가 공통으로 택한 무기는 하나다 — 쿠팡과 가격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

오프라인은 웃고, 온라인은 조용했다
이 반격이 나온 배경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최근 원화 약세와 반도체 업계발 성과급 효과가 겹치며 국내 백화점 3사는 7개월 연속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환율 덕에 씀씀이가 커진 외국인 관광객이 명품 매장으로 몰렸고, 불가리·티파니 같은 브랜드는 국내 백화점에서 역대 최고 매출을 갈아치웠다. 그런데 이 호황의 수혜는 철저히 오프라인에 머물렀다 — 같은 기간 이커머스 플랫폼은 이 훈풍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반면 대형마트는 온라인과 다이소 같은 초저가 채널 양쪽으로 고객을 뺏기며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즉 지금 백화점의 위치는 이렇다: 오프라인에서는 명품·프리미엄 카테고리로 압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지만, 그 힘이 온라인으로는 좀처럼 옮겨붙지 않았다. 그동안 백화점들이 내놓은 자체 온라인몰이 대체로 쿠팡·11번가 같은 오픈마켓의 문법(최저가·프로모션·물량 경쟁)을 어설프게 따라 하다 존재감을 잃은 전례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백화점의 진짜 경쟁력 — MD가 엄선한 상품, 브랜드와의 관계, 매장 경험 — 은 정작 온라인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더현대 하이가 뒤집은 것
현대백화점이 더현대서울의 온라인판으로 내놓은 "더현대 하이"는 이 실패 공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메인 화면에 할인·프로모션·광고 대신 라이프스타일 큐레이션 콘텐츠를 배치했고, 아무 브랜드나 입점시키는 오픈마켓과 달리 현대백화점 바이어가 직접 검증한 브랜드만 약 3,000개 규모로 선별해 들였다. 상품을 검색해서 찾는 방식이 아니라, MD가 테마별로 골라 놓은 상품을 "발견"하고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다.
여기에 AI 쇼핑 어시스턴트 "헤이디(HEYDI)"가 예산 안에서 상품을 추천해주고, 오프라인에서 꽃을 산 고객에게는 향수나 화병을, 온라인에서 와인잔을 산 고객에게는 어울리는 상품을 추천하는 식으로 온·오프라인 구매 이력을 넘나드는 개인화 큐레이션을 시도한다. 앱 UX 자체도 "젬(gem)"을 모으는 게임적 요소를 넣어 단순 쇼핑이 아니라 발견하는 재미를 주도록 설계했고, tvN 예능 콘텐츠 협업이나 북유럽 라이프스타일 에디토리얼 같은 자체 콘텐츠 투자도 병행하고 있다.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출시 약 9주 만에 거래액이 540억 원을 넘어서며 기존 온라인몰 대비 43.5% 늘었고, 신규 가입자는 전년 동기 대비 약 560% 증가했다. 누적 방문자는 960만 명, 하루 평균 방문자는 전년 대비 446% 늘었다. 신규 가입 고객 중 실제 결제까지 이어진 비율도 30%에 달한다. 카페24와의 플랫폼 연동, 카카오톡 채널과의 제휴까지 더해지는 걸 보면, 단순히 앱 하나를 새로 낸 게 아니라 중소 브랜드·크리에이터까지 끌어들이는 플랫폼으로 키우려는 의도가 읽힌다.
신세계·롯데도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주목할 지점은 이 흐름이 현대 혼자만의 실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8월 VIP 온라인 유도 플랫폼 "비욘드 신세계"를 내놨고, 온라인 구매액을 백화점 VIP 실적으로 100% 인정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해 해당 기간 매출을 전월 대비 80% 이상 끌어올렸다. 여기에 하이엔드 큐레이션 플랫폼 "더 쇼케이스"를 통해 람보르기니 서울과 협업한 국내 단독 에디션을 선보이는 등, VIP 고객을 겨냥한 한정판·익스클루시브 콘텐츠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기존 멤버십 포인트 제도를 "에비뉴엘 큐레이션"으로 개편해, VIP 고객이 등급 포인트로 럭셔리 호텔·파인다이닝·레저 등 6개 카테고리 100여 개 제휴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이커머스 자회사 롯데온과는 별도로 자체 앱 중심의 온오프라인 연계를 강화하며, AI 챗봇 "더스틴"과 가상 피팅 서비스 "셀핏"까지 붙였다. 실제로 롯데백화점은 이달 초 발표된 2026 국가고객만족도 백화점 부문 1위에도 올랐다.
세 회사의 구체적인 전술은 다르지만 — 현대는 큐레이션 콘텐츠 플랫폼, 신세계는 VIP 온라인 실적 통합, 롯데는 경험형 멤버십 — 방향은 정확히 같다. 쿠팡·무신사가 만들어 놓은 가격·속도 경쟁의 링 위에 올라가지 않고, 백화점이 원래 잘하던 것 — 큐레이션, 브랜드 신뢰, VIP 관계 — 을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다.
왜 지금 이 흐름이 중요한가
이 흐름이 단순한 신규 서비스 출시 이상으로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동안 국내 이커머스는 쿠팡의 로켓배송(속도)과 오픈마켓의 최저가 경쟁으로 정의돼 왔다. 백화점들이 이 경쟁 축을 포기하고 큐레이션·개인화·경험이라는 완전히 다른 축으로 온라인 시장에 진입한다는 것은, 국내 이커머스 지형에 가격·속도가 아닌 세 번째 경쟁 축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신호다. 이는 무신사처럼 큐레이션을 무기로 성장한 플랫폼에게도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는 뜻이다 — 다만 무신사가 가격에 민감한 젊은 소비자층을 타깃으로 한다면, 백화점 큐레이션몰은 더 넓은 라이프스타일 카테고리에서 소비 여력이 있는 고객층을 정조준하고 있다.
둘째,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백화점은 오프라인에서 쌓아온 MD 역량·브랜드 관계·VIP 데이터를 온라인 채널로 그대로 확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이는 큐레이션이라는 강점이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물리적 맥락 없이는 온라인에서 재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즉 지금이 "백화점의 온라인 DNA 이식"이 실제로 가능한지 가늠하는 시험대다.
실무 시사점
- 백화점 이커머스 담당자: 더현대 하이의 초기 성과는 "할인 없이도, 오히려 할인이 없어야" 신규 고객 유입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프로모션 예산을 트래픽 유입이 아니라 큐레이션 콘텐츠·MD 역량에 재배분하는 것이 이 모델의 핵심 전제다
- MD·바이어: 온라인 큐레이션이 성립하려면 오프라인 MD의 안목을 온라인 상품 구성으로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3,000개 브랜드 규모로 선별하는 현대의 방식처럼, "많이"가 아니라 "정확히"를 지향하는 상품 큐레이션 역량이 온라인 채널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
- 브랜드·입점사 담당자: 백화점 큐레이션몰은 오픈마켓과 달리 입점 자체가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초기에 채택되는 브랜드는 큐레이션의 "얼굴"이 되는 만큼, 백화점 바이어와의 관계 구축이 온라인 채널 확장의 새로운 관문이 되고 있다
- VIP·멤버십 담당자: 신세계의 온라인 구매 VIP 실적 통합, 롯데의 경험형 멤버십 사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VIP 등급을 하나로 묶는 것이 채널 전환의 핵심 레버라는 것을 보여준다. 온오프라인 구매 이력을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 경쟁사(쿠팡·무신사·네이버) 전략 담당자: 백화점의 온라인 진출은 가격 경쟁이 아니라 카테고리·고객층 경쟁이다. 프리미엄·라이프스타일 카테고리에서 소비 여력이 있는 고객층을 백화점에 뺏기지 않으려면, 단순 최저가가 아닌 자체적인 큐레이션·개인화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결론
더현대 하이의 초기 성과가 의미 있는 이유는 숫자 자체보다 이 숫자가 증명한 가설에 있다 — 백화점은 쿠팡의 문법으로 싸우지 않아도 온라인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세계·롯데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베팅에 나섰다는 사실은 이것이 한 회사의 실험이 아니라 업계 전체의 방향 전환이라는 신호다. 다음 국면은 이 초기 성과가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반짝 화제성에 그치는지에 달려 있다. 그 답이 나오는 순간, 국내 이커머스 지형의 세 번째 축이 완성될지 여부도 함께 결정될 것이다.
백화점이 온라인몰을 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각 사가 자체 온라인몰을 몇 번씩 리뉴얼했지만, 대부분 쿠팡·11번가의 문법을 어설프게 흉내 내다 존재감 없이 사그라들었다. 이번이 다른 이유는 명확하다 — 처음으로 "우리가 잘하는 것"으로 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만 초기 84만 신규 가입자 숫자에 취해서는 안 된다. 진짜 관건은 재구매율과 객단가다. 신규 고객 30%가 결제까지 갔다는 건 좋은 신호지만, 이들이 6개월·1년 뒤에도 남아있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큐레이션은 한 번의 발견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취향을 맞춰줘야 유지되는 관계다.
국내 백화점 3사가 동시에 이 베팅에 나섰다는 건 반갑다. 다만 세 회사가 서로 다른 무기(큐레이션 콘텐츠·VIP 통합·경험형 멤버십)를 들고 있다는 건, 아직 "이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업계에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2년 뒤 이 중 어느 모델이 살아남는지가 국내 프리미엄 이커머스의 표준을 정하게 될 것이다.